파리의 <귀여운 기적>으로 불리던 젊은 리스트는 마리 다구 백작부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들은 스위스 제네바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그 곳에서 작곡된 <순례의 해, 제 1년>은 소박하고 정겨운 스위스의 자연과 그의 혼란스럽고 감상적인 모습이 생생하고 자연스레 담겨있다. 스위스의 젊은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앙 샤모렐은 유연성있고 강한 타건과 윤기흐르는 음색, 깨끗하고 절제된 페달링으로 성숙하고 심도있는 음악을 들려준다.
1835년 여름 리스트가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사랑에 빠진 후,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며 작곡했던 곡이 <순례의 해>이다. 1권 스위스는 리스트와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 처음으로 도망쳐 온 곳으로 쥬네브의 레만 호숫가의 추억이 모티브가 되어 작곡되었다. 스위스 로잔 태생의 크리스티앙 샤모렐은 게르하르트 오피츠를 사사한 피아니스트로 독주활동과 더불어 제네바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아티스트다. 스타일상으로 보자면 힘과 기교보다는 섬세한 색채 블렌딩과 칸타빌레 능력이 뛰어난 연주자로 분류된다. 때문에 리스트가 <순례의 해>에서 추구한 시적이고 묘사적인 감흥이 한껏 아름답게 잘 살아나있다.
샤모렐이 해석하고 있는 연주의 골격은 스케일보다 이야기의 묘사에 있다. 그 덕에 세심하게 좇아가는 스위스의 정경이 떠오르며, 드뷔시와 같은 인상주의 곡을 연주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위압적인 풍모로 승부를 걸기 보다는 절제된 페달링과 서정적이지만 응축된 에너지를 은근히 드러내는 듯한 자세도 그렇다. 다만 그 세심한 면이 지나쳐 긴장감이 떨어지거나, 디테일에 대한 몰두가 지나쳐 큰 맛이 부족하다는 인상이 들기도 한다. 그런 특징은 3번째곡 '파스토랄'과 6번째곡 '오베르만의 계곡' 9번째곡 '쥬네브의 종소리'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폭풍'과 같은 비르투오적인 곡보다도 '파스토랄', '오베르만의 계곡'이 샤모렐의 연주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곡이다. '파스토랄'의 노래하듯 가볍게 치고 나가는 탄력감이나 온화한 분위기는 연주자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다. 15분에 달하는 '오베르만의 계곡'은 하나의 프레이즈 마저도 허투로 지나치는 법이 없을 만큼 끈질기게 묘사에 몰두하는데, 그런 점에 비해 긴장감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감각적인 구성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사라질듯 어른거리는 아티큘레이션으로 그려낸 정취, 잡힐 듯 말듯한 스위스에서의 추억과 풍경, 그 속에 담겨진 백작부인과의 사랑에 대한 리스트의 자기 투영, 그리고 그것을 그려내는 샤모렐의 손길은 야릇한 감흥으로 피어 오른다. 7번째곡 '에필로그'의 나긋한 터치와 칸타빌레 감각, '쥬네브의 종소리'에 담긴 시적이고 종교적인 감흥, 상념에 깊게 잠긴 리스트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모습을 뛰어나게 만들어냈다. 다만 보너스로 삽입된 리스트 편곡의 바그너 '이졸데의 죽음'에서도 드러나듯이, 관능적인 표현과 비르투오적인 테크닉의 효과적인 연출력에 있어서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리스트의 시적인 감흥을 세심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난 연주이나, 전달력에 있어 감화력이 떨어진다는 점은 아쉽다. 텍스트에 대한 충실한 태도가 읽히지만 좀 더 인상이 강한 연주를 위해서라면 세심한 묘사력에 더해진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 월간 La Musica - 김상호
[ 수록곡 ]
1. Chapelle De Guilaume Tell
2. Au Lac De Wallenstadt
3. Pastorale
4. Au Bord D`Une Source
5. Orage
6. Vallee D`Obermann
7. Eglogue
8. Le Mal Du Pays/ Heimweh
9. Les Cloches De Geneve/ Nocturn
10. Mort D`Isolde : Scene Finale De L`Opera "Tristan Et Isolde" De R. Wagner (Transcrip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