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의 바로크 앙상블, 플로릴레기움의 비발디 앨범은 작곡가가 음악감독으로 재직했던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를 위한 음악을 다루고 있다. 소녀들을 위한 양육기관이었던 오스페달레는 탁월한 음악연주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는데, 저 유명한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를 비롯한 성악곡과 빛나는 명인기를 뽐내는 협주곡들은 이를 실감케 한다.
엘린 매너헌 토마스의 청아한 소프라노 음성은 신선한 감흥을 주며, 얼마 전 악보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던 플루트 협주곡 <그랑 모굴>, 바이올린-첼로 협주곡 등에서도 애쉴리 솔로몬을 비롯한 플로릴레기움의 명인들이 멋진 연주를 들려준다.
플루티스트이자 리코더 연주자인 애슐리 솔로몬을 중심으로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바로크 음악 연주의 지평을 넓혀 온 영국의 시대악기 연주단체 플로릴레기움이 이번에는 비발디 음반을 선보였다. 여기서는 ‘협주곡 작곡가’ 비발디가 남긴 여러 가지 형태의 협주곡들과 함께 그가 ‘사제’로서 교회와 관계를 맺고 어떤 활약을 했는지도 조명했는데, 전체적으로 비발디에게서 음악을 배웠던 피에타 고아원 소녀들의 다양한 음악적 재능도 엿볼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잘 짜여졌다.
무엇보다도 종교적 텍스트에 곡을 붙인 두 곡의 소프라노 독창곡이 관심을 끄는데, 여기서 독창자로는 일찍이 티모시 브라운이 지휘했던 존 러터의 ‘레퀴엠’ 연주(Naxos)에서도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백옥같이 순수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던 엘린 매너핸 토머스가 페르골레지의 ‘스타바트 마테르’ 녹음에 이어 다시 한번 플로릴레기움과 손을 잡았다. 이들의 연주는 가령 “주님을 찬양하라” RV. 601에서는 상드린 피오가 오타비오 단토네가 이끈 아카데미아 비잔티나와 함께 들려 주었던 좀 더 오페라와 같은 느낌이 드는 연주(Opus111)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피오가 깊고 그윽한 목소리로 좀 더 진한 비브라토를 구사하며 세속적인 관능미를 발산했던 것에 비해 비브라토를 절제한 토머스의 맑고 깨끗한 목소리는 마치 에마 커크비를 연상시킬 정도로 순수한 매력이 있고, 특히 해가 뜨는 장면을 묘사할 때는 그 느낌이 아주 강렬하여 인상적이다. 플로릴레기움도 작은 규모의 앙상블로 정교하고 투명한 울림을 들려 주는 데 주력하면서 토머스의 목소리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악 반주는 보다 현란한 콘티누오 연주를 중심으로 강한 비트를 통해 비발디 특유의 정열을 숨김없이 드러냈던 아카데미아 비잔티나의 반주와는 확실히 대조적이다. 유명한 “세상에 참 평화는 없어라” RV. 630에서도 마찬가지로 토머스는 커크비(L’Oiseau-Lyre)에 필적하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뽐냈고 시대악기의 섬세한 질감이 드러나는 플로릴레기움의 반주도 매력적이다. 이들 두 곡의 독창곡은, 가령 킹스 콘소트의 서포트를 받아 캐럴린 샘슨이나 데보라 요크가 들려 준 노래(Hyperion)도 마음 속 깊이 파고 들긴 하지만 토머스의 정갈한 음색도 충분히 음미할 만하다.
한편, 여기에 수록된 기악 작품들은 비르투오소 바이올린 독주자가 눈부신 테크닉을 과시할 수 있는 독주 협주곡들보다는 좀 더 다른 형태의 협주곡들이다. 우선 로마의 청중을 위해 자신의 교회 음악을 이용하여 ‘학구적’ 양식으로 작곡한 콘체르토 마드리갈레스코, RV. 129에서 플로릴레기움은 소프라노 독창곡에서와 마찬가지로 소규모 앙상블의 장점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 준다. 마치 비올 콘소트를 연상시키는 이들의 섬세한 앙상블은 이 곡의 고풍스러운 성격과도 잘 어울리며 대위법적인 구조도 투명하게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작년 4월에 새로 발견되어 화제를 불러 일으킨 바 있는 플루트 독주 협주곡 <일 그란 모굴>에서는 이 악단의 리더인 애슐리 솔로몬이 독주를 맡았는데, 이들보다 앞서 케이티 버처의 독주로 같은 곡을 녹음했던 라 세레니시마(AVIE)가 강한 악센트와 좀 더 풍부한 울림으로 비발디 음악의 힘찬 에너지를 뿜어냈던 것에 반하여, 플로릴레기움의 연주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좀 더 차분하고 편안하며 섬세한 디테일을 자연스럽게 살리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 협주곡에서도 마찬가지로 파비오 비온디와 에우로파 갈란테(Opus111)의 보다 리드미컬하고 비르투오소적인 면모와 강한 개성을 마음껏 발산하는 연주와는 분명 대조적이다.
전체적으로 이 음반에서 들을 수 있는 플로릴레기움의 앙상블은 역시 극단적인 과장 없이 투명한 화음과 섬세한 뉘앙스를 자연스럽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이를 테면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의 지휘로 아카데미 오브 에인션트 뮤직(L’Oiseau-Lyre)이 들려 주었던 것과 같은, 소위 영국 시대악기 연주단체의 전형적인 비발디 연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래서 좀 더 짜릿한 모험을 즐기고 싶어하는 이들에겐 또 다른 선택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로릴레기움의 깔끔하게 잘 다듬어진 보다 온화한 앙상블과 엘린 매너핸 토머스의 청아한 노래는 계속 가까이 두고 즐기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 월간 La Musica - 전상헌
[ 수 록 곡 ]
Antonio Vivaldi (1678-1741)
01-04. Concerto Madrigalesco Rv129
05-13. Laudate Pueri Rv 601
14-16. Il Gran Mogul Rv 431a
17-20. Motet Nulla In Mundo Rv 630
21-23. Concerto In B Flat Rv 547
Elin Manahan Thomas, soprano
Florilegiu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