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엔리코 가티와 '붉은 머리 사제' 안토니오 비발디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한쌍인 것 같다. 그러나 겉만 번지르한 유행과 상관없이 바로크 음악의 내밀한 아름다움에 몰입해 있는 엔리코 가티가 연주하는 안토니오 비발디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외향적인 현란함 이면에 숨겨진 감정을 드러내는 특별한 것이다.

1709년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안토니오 비발디의 작품 2는 비발디 최초의 독주 바이올린과 바소 콘티누오를 위한 소나타집이다. 총 12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는 1, 2, 3, 4, 5, 7, 9번 등 총 7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 동안 비발디 작품 2를 들려준 좋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았지만 대부분 비발디의 소나타 작품을 외향적인 비르투오조 작품으로만 생각하여 의미없는 화려한 장식을 남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연주자들의 비발디가 그늘이 없이 햇살이 내려쬐는 산 마르코 광장이라면 가티의 비발디는 베네치아 운하의 구석길처럼 은밀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는 어둠속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비발디를 연주한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적으로 부족한 것도 아니다. 사실 가티의 비발디 연주는 은근히 장식이 많은 연주에 속하며 비르투오조로서의 솜씨도 완벽하다. 그러나 그 모든 장식과 표현들이 곁가지처럼 음악의 껍질을 겉돌지 않고 비발디 음악의 연극적인 특성, 호소력 넘치는 수사법에 녹아들어있다. 바로 그 점이 가티를 수 많은 뛰어난 바로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앙상블 오로라 멤버들의 완벽한 서포트, 글로싸 레이블의 자연스러운 음향 덕분에 음반의 만족도는 100% 이상이다. 가티를 비롯한 고음악 연주자들의 고향, 아르카나 레이블의 프로듀서로 지난 2006년 타계한 미셀 베른슈탱을 추모하는 의미있는 음반이기도 하다.

연주 : 엔리코 가티(바이올린), 가에타노 나실로(첼로), 모니카 푸스틸닉(아치류트), 귀도 모리니(하프시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