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우스, 소닉스, 스파이럴 그루브, 비비드 오디오 ... 3년 전 처음 도쿄 오디오 쇼에 갔을 때 만난 생소한 브랜드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수입되고 있다. 그 사이, 한국의 오디오 환경이 별로 좋아진 것 같지는 않지만, 부지런히 새로운 브랜드를 소개한 결과, 점차 한일 양국의 격차는 줄어들고 있다.

또 한편으로 보면, 일본이라는 시장이 하이엔드 오디오 메이커들에게 큰 매력을 주지 못하는 뜻도 된다. 어쨌든 최근에는 신제품의 발표를 도쿄에서 하는 경우가 적어졌으니까. 아마 그 사이, 뮌헨이라던가, 덴버, 홍콩 등의 오디오 쇼들이 부쩍 성장했고, 시장이 다각화된 탓도 있으리라. 아무튼 일본 시장의 위세가 한풀 꺾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이 시장의 사이즈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며,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뭔가 건질 것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 이번 방문 때엔 아키하바라도 두 어 차례 다녀봤는데, 과연 숱한 진공관이며 트랜스며 저항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각종 기술 서적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눈에 띄지 않는 애호가들의 층이 매우 두터운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하, 이게 바로 일본 오디오계의 힘이구나. 아무리 미국발 금융 위기에 서브 프라임 사태가 와도, 일본이라는 나라는 기본이 다르구나. 바로 그 흔적을 찾기 위해 이번 방문에는 일정을 대폭 늘려서 도쿄 오디오 쇼뿐 아니라, 하이엔드 쇼도 별도로 취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실은 작년에 탐방할 때, 하이엔드 쇼를 둘러본 기억이 있다. 그러나 워낙 일정에 쫓긴 탓에 꼼꼼히 보지 못했으므로 아쉬움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일종의 보물섬처럼 차근차근 살펴보면 재미있는 회사나 브랜드가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에 중점적으로 하이엔드 쇼를 보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도쿄 역 근방의 인터내셔널 포럼에서 개최되는 도쿄 오디오 쇼는, 일종의 메이저 수입사들이 연합해서 벌이는 행사로, 우리와 친숙한 <스테레오 사운드>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올해에는 10월 3일부터 5일까지, 그러니까 금, 토, 일 3일간 열렸다.

반면 이 메이저와 무관한 메이커들이 출전하는 하이엔드 쇼는 정확히 일 주일 뒤인 10월 10일, 11일, 12일 3일간에 걸쳐서 열렸다. 장소는 역시 도쿄 역 부근의 교통 회관으로, 규모는 작아서 한 개 층을 사용하고 있다. 이번 리포트는, 하이엔드 쇼를 먼저 소개하고, 도쿄 쇼로 넘어가기로 하겠다.

하이엔드 쇼

<오디오, 음악, 딜러들과 3일간>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건 하이엔드 쇼는, 매년 5월과 10월에 열린다. 5월 행사에는 별로 많은 업체가 참여하지 않지만, 10월 두 번째 주의 주말에 열리는 행사는 비교적 커서, 만일 일본에 자사를 홍보하고자 하는 한국 메이커들이라면 한번 눈 여겨 볼만하다. 도쿄 오디오 쇼가 몇 개의 수입업체를 중심으로 꽁꽁 뭉쳐서 매우 배타적인 만큼,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이 쇼의 장점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규모가 작다고 해도, 오디오 업체뿐 아니라, <음악의 벗>이나 <음원 출판> <교도 통신> 등 음악뿐 아니라 일부 매스컴도 개재한 행사인 만큼 실제 쇼장에 가보면 음반과 음악 서적 코너도 상당함을 알 수 있다. 또 정규 시청회를 하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은 애호가층이 상당해서, 일본의 오디오 열기가 여전히 식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이 쇼의 행사장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룸 하나를 하나의 업체가 통째로 쓰는 경우이고, 둘째는 룸 하나를 여섯 업체가 나눠서 쓰는 경우이며, 셋째는 일종의 도떼기 시장이라고 할까, 아무튼 많은 업체들이 제품만 진열만 하는 경우다. 따라서 첫째의 경우, 메인 업체가 3개 정도의 시스템을 운용하면서 다양한 시청회를 여는 반면, 둘째의 경우엔 돌아가면서 시연을 한다. 셋째는 아예 음악을 틀 수 없으므로, 해드폰을 여러 개 준비해서 관람객들이 들어보게 한다.

그러나 배타적인 도쿄 쇼에 비해, 매니악한 메이커나 숍이 많이 출전하고 또 느닷없는 하이엔드 메이커의 신제품 발표회도 열려서 잘만 하면 월척을 낚을 수도 있다. 이번에 필자는 여기서 디지털 도메인이라는 일본의 신흥 디지털 앰프 메이커를 만났고, 랑셰의 패시브형 스피커 No.5의 발표도 접할 수 있었다. 만일 도쿄 오디오 쇼만 보고 왔다면 이런 빅 뉴스를 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 일단 특종부터 전하자. 코로나 특유의 개방적이면서 질감이 풍부한 고역을 좋아하는 분들은, 그간 액티브 방식으로 만들어진 랑셰의 제품에 좀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고역은 설계 방식상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서브 우퍼 형태로 저역에 앰프가 물려 있으니 고작 중역정도에서 솜씨를 발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데 패시브로 바뀌면서 고역을 제외한 나머지 대역 전체를 커버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양질의 파워 앰프가 힘을 낼 때가 온 것이다.

랑셰의 장점이라면, 일단 빼어난 스피드를 들 수 있다. 또 밸런스도 양호해서, 어떤 형태의 음악이든 온건한 형태로 묘사한다. 전대역에서 일체의 딮이나 피크 등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는 디지털 도메인(Digital Do Main)이라는 앰프와 물려 시연되었는데, 디지털 앰프 특유의 스피드까지 가세해, 상당히 박력있고, 다이내믹스가 풍부한 음이 나왔다. 개인적으로는 액티브보다 이 패시브 방식에 더 마음이 끌렸음을 밝힌다.

참고로, 디지털 도메인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디지털 앰프 회사로 몇 종류의 앰프와 소스기를 생산하고 있다. 신생 회사답지 않게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어서, 과연 이게 디지털 앰프냐 의구심을 갖게 할 만큼 풋풋하고, 저역 컨트롤이 뛰어난 제품을 만들고 있다. 시연장에는 랑셰 외에 JBL DD 66000과 카바세의 스피어 등의 스피커들을 돌려가며 매칭하고 있었는데, 스피커의 개성을 충분히 발휘하면서도 잘 절제된 음향을 들려줘 큰 인상을 받았다.

하이엔드 쇼의 또 다른 수확이라면, 대망의 PMC의 신작들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모델 명에 “아이”(i)를 붙인 시리즈로, 이를테면 TB2i, OB1i, FB1i 등이 그것이다. 정통적으로 PMC는 브라이스턴과 좋은 상성을 보였는데, 이번 시연에도 브라이스턴이 동원되었다. 트랜스미션 라인 방식을 통한 박력있는 저역을 듣다 보면, 가끔 시청실이 부르르 떠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싸고, 좋은 앰프로 트라이오드를 꼽곤 한다. 이번에 이 회사의 부스에 가보니, 고작 10만5천엔 정도 하는 인티 앰프부터 168만엔이나 하는 모노 블록 파워 앰프까지 다양한 제품군이 전시되어 있어서 흥미를 끌었다. 사실 이렇게 다양한 가격대에 걸친 모델을 내는 회사는 드문 지라, 전체적인 통일성에 의구심을 품었는데, 음을 들어보니 절대 그렇지 않았다. 싸면 싼 대로 성능이 우수했고, 고가의 제품은 웬만한 하이엔드 부럽지 않은 구동력과 질감을 들려줬다. 이번에는 CDP와 함께 물려서 들었는데, 제일 싼 것이 CD32SE라는 모델로 12만6천엔 정도 한다. 기존의 트라이오드 팬이라면 관심을 가져볼 만한 대목이다.

카이리 사운드의 부스에는 로젠 크란츠(Rosen Kranz)라는 풀레인지 유닛을 이용한 스피커를 선보여서 관심을 끌었다. 매칭된 앰프는 아큐페이즈 구형에 소스는 C.E.C.의 보급형 CDP. 그럼에도 풀레인지의 성격상 대역간의 이음새를 느낄 수 없는 자연스런 음향이 눈길을 끌었다. 역시 풀레인지의 매력은, 이런 혼잡한 쇼장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그밖에 하이엔드 쇼의 재미라면 다양한 악세서리를 파는 부스들이 많다는 것이다. 벨드림이라는 회사는 카트리지뿐 아니라, 암이며 셸, 케이블 등을 만들고 있는데,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도 제품 하나하나의 만듦새가 꼼꼼해서 가격대비 성능에서 큰 이점을 갖고 있었다. 에프오 큐(fo.Q)라는 회사는 턴테이블 관련 악세서리 전문으로, 매트나 시트, 스태빌라이저 등 특수 고무 재질을 이용한 다채로운 품목을 선보이고 있었고, 안단테를 랙, 스파이크, 인슐레이터 등이 전문이며, 박크 공예사는 오래된 스피커를 수리하는 전문점이다. JBL이나 야마하, 다이아톤 등 일본인들이 애지중지하는 회사들의 제품들이 신품처럼 말끔히 수리된 모습은 보기에도 좋았다.

마지막으로 사운드 피델리티는 인터넷 소스의 음악을 CD 클래스로 업샘플링해서 고품질의 재생을 목표로 하는 회사다. 이 회사의 Model 1 B 란 제품은 그 대표작으로, 무려 가격이 170만이나 해서 시장성 면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지만, 음 하나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거의 무료나 다름없는 방대한 인터넷을 소스로 삼는다는 점에서 큰 메리트가 있지 않나 싶다.

도쿄 오디오 쇼

이어서 눈길을 도쿄 오디오 쇼로 돌려보자. 개인적으로는 이번이 3회째 방문이라 큰 설레임은 없었다. 또 익히 아는 메이커들이 늘 사용하는 부스에서 시연함으로, 이제는 좀 걷다보면 아 여기가 이 회사의 부스였지, 하는 감도 왔다. 만일 작년과 재작년에 이은 똑 같은 라인업으로 시연한다면, 일단 대상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다. 똑같은 뉴스를 재탕, 삼탕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가장 눈길을 끈 부스나 신제품을 소개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겠다.

아마 아큐톤 유닛에 관심있는 분들이 많을 듯한데, 일단 아큐톤을 쓴다고 하면 중역뿐 아니라 저역과 고역도 아큐톤 제품이 정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필자도 그 부류 중의 한 명이다. 그러나 중고역은 아큐톤제를 쓰더라도 저역만큼은 에톤이나 다른 유닛을 쓰는 회사도 꽤 된다. 그 중 카르마는, 에톤을 사용해 놀랍도록 음색과 스피드에서 아큐톤과 위화감이 없는 음을 성공시킨 회사이고, 그밖에 몇몇 회사도 나름대로 극복하고 있다.

그런데 아큐톤을 중저역만 사용하고, 고역은 다른 유닛을 쓰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놀랍게도 이번에 발표한 루멘 화이트의 신작 아퀼라(Aquila)가 고역에 1인치 커스텀 사양의 링 라디에이터를 사용했다. 아큐톤의 인기몰이에 큰 역할을 한 루멘 화이트에서 고역에 이런 유닛을 단 점이 흥미로워 FM 411 MK2 파워와 연결된 음을 들어보니, 상당히 음향이 다르다. 어딘지 밀도감이 높으면서 쨍 하는 맛 대신 진중한 고역이 나왔다. 이 고품위하고, 묘한 질감을 갖고 있는 음은, 상당한 중독성을 갖고 있어서 앞으로 애호가들의 흥미를 끌 것으로 예상된다.

아큐톤과 관련한 뉴스를 하나 더하면, 이번에 소닉스에서 발표한 스피릿(Spirit) 역시 미드레인지에 일명 점박이라고 하는 유닛을 중심으로, 리본 트위터를 두 개나 박은 제품을 선보였다. 글래스 마스터의 모노 블록 파워를 무려 4개나 동원한 호화 사양으로 시연되었는데, 아큐톤 특유의 투명하고, 분해력이 높은 음이 시청실을 청아하게 감싸는 대목은 참으로 탄성을 나오게 했다.

이번 쇼에서 최고가의 라인 업을 꼽는다면 바로 비비드 오디오와 골드문트가 만난 부스다. 비비드의 플래그쉽 기야(GIYA)에 화제의 신제품 텔로스 5000이 물린 데다가 소스는 캘리번을 썼으므로,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라인 업이다. 이 행사가 진행된 시청실은 약 50평이 넘는 공간인데, 스가노의 사회로 진행된 시연에서 60여 명의 방청객들을 휘어잡는 음향으로 가득 채워, 과연 이 클래스의 제품은 다르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시연된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이 마치 실제 연주되는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현대 하이엔드 오디오의 궁극을 체험한 듯한 느낌이다.

이어서 신제품을 몇 개 소개하기로 하겠다. 우선 에어 타이트부터 전하면, 드디어 이 회사에서 턴테이블을 발표한다. 워낙 진공관 앰프로 유명한 곳이라, 과연 턴테이블로 외도하는 것이 올바른가 의문을 표할 듯하지만, 이번에 시제품으로 전시만 된 턴테이블로 말하면, 그 만듦새가 결코 만만치 않다. 마그네틱 베어링에 2개의 톤암을 장착할 수 있는 사양으로, 솔리드 알루미늄으로 만든 바디가 특히 신뢰감을 준다. 이와 관련, 동사에서는 PC 1 카트리지의 최고 사양인 슈프림을 출시했는데, 이미 미국에서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아날로그 애호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대목이 아닐까 한다.

크렐 하면 요즘은 종합 오디오 메이커의 이미지가 강한데, 이번에 재미있는 제품이 하나 나왔다. 이볼루션 707이라는 모델로, 일종의 서라운드 프로세서이다. HDMI 1.3 대응은 기본이고, 7.1채널을 커버하며, 64비트의 DSP를 내장하고 있다. 영상 역시 어떤 소스라도 1920X1080P로 업그레이드 시켜주니, 좀 더 고품위한 AV 시스템을 원하는 분들에겐 좋은 소식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동사는 모듈라리 듀오(Modulari DUO)라는 신작 스피커도 선보이고 있다. 중고역 챔버와 저역 챔버를 별도로 나눈 2피스 구성에 우퍼는 무려 3발의 유닛이 장착된 사양으로, 이 신선한 음향 역시 특필할 만하다.

턴테이블, CD 플레이어, 앰프 등으로 차근차근 라인업을 발전시킨 오라클에서 대망의 스피커가 출시되었다. 프로페시(Prophecy)라는 모델명이 붙은 이 스피커는 그리 크지 않은 3웨이 형태로, 고역에는 링 라디에이터를 채용하고 있다. 또 미드와 우퍼에 각각 페이즈 플러그를 단 모습이 이채로운데, 워낙 투명하고, 상쾌한 음 조성을 하는 오라클인지라, 그 느낌이 스피커에 강하게 묻어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스피커를 만드는 오디오 마시나도 이번에 신작을 발표했다. 마에스트로라고 이름 붙인 이 모델은, 리본 트위터를 중심으로, 그 위 아래에 중역을 단 다음, 저역은 별도의 챔버에 일종의 서브 우퍼 개념으로 상부와 접합하고 있다. 손으로 두드리면 아플 만큼 단단하고 밀도감 높은 인클로저는 절삭 가공의 위대한 승리이며, 질감이 풍부한 음 역시 이 회사의 내공이 점차 깊어가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마지막으로 헬크로에서 재미있는 제품이 나왔다. 일종의 유니버설 플레이어인 EC800이 그것인데, CD나 SACD뿐 아니라 DVD, dts 오디오 등을 두루 포괄하는 형식이다. 가격도 90만엔 정도로 이 회사의 다른 제품이 비하면 약간 저렴하고, 음에 관한 한 믿어도 될 것이다. 유니버설 플레이어 하면 고개부터 젓는 분들이라면 생각을 달리 해볼 만한 제품이다.

처음 도쿄 오디오 쇼를 방문했을 때엔 일종의 컬쳐 쇼크를 받을 만큼 정신이 없었는데, 세 번째 방문이 되니까 상당히 차분한 가운데 취재에 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익히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함정이 있다고, 과연 눈을 크게 뜨고 다녀보니 의외로 곳곳에 신제품이 널려 있었다. 내년에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벌써부터 기대를 갖게 한다. 물론 그게 실은 오디오 업계 전반에 대한 궁금증에 다름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