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하고 독특한 클라리넷이 큰 규모의 실내 앙상블과 때론 융화되고 때론 충돌하는 모습을 담은 현대음악 작품집이다. 드라마틱하고 힘있는 리듬의 앙상블과 때때로 특별한 효과를 주는 클라리넷의 대조가 돋보이는 코르스루드의 리퀴드, 수수께끼같이 난해한 프라몽동의 슈리프트, 재즈적이고 즉흥적인 아울의 콘체르토, 쉽게 잊혀지지 않는 클라리넷의 꾸밈음과 단조로운 저음과 복잡한 반주의 앙상블이 대조가 인상적인 셀시의 Kya를 담고 있다. 클라리넷의 유창하고 감미로운 음색을 한껏 맛볼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집이다.
모처럼 현대음악 애호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음반이 나왔다. 20세기에 태어난 작곡가들의 음반들은 끊임없이 출시되고 있지만 최근에는 신낭만의 기조로 과거의 향수를 재현하거나 대중 음악의 언어를 사용하여 포스트 모더니즘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음악의 비중이 상당히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낯선 소리로 미래지향적인 감성을 뒤흔드는 이 음반의 수록곡들은,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음악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잠시 분주함으로 만나지 못했던 애인을 오랜만에 재회한 기분이다.
이 음반은 클라리넷과 앙상블을 위한 다섯 작품을 싣고 있다. 첫 곡은 뱅쿠버의 작곡가인 존 코스러드의 ‘액체’로, 이 음반의 타이틀로 선택된 작품이다. 큰 도약 없이 주변의 음정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작은 동기들이 반복되면서 마치 물이 흐르듯 진행하는 모습이 미니멀리즘과 유사하다. 여기에 리듬을 바꾸면서 음악의 긴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특징을 더하면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선상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작곡가가 자신의 재즈 밴드를 갖고 있을 정도로 재즈와 팝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만큼, 화음이나 성부들의 반주가 영화음악이 연상될 정도로 리드미컬하고 자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 감성적이면서 느린 멜로디가 더해져 애틋한 분위기 메이킹에 성공한다.
야니크 플라몬든의 ‘문자’는 마치 글자를 쓰듯 자유롭게 유희하는 독주 클라리넷의 활약에 모든 것을 맡겼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화려한 음색의 카펫을 깔아주는 믿음직한 앙상블이 있기에 클라리넷 독주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끼를 온전히 드러내었다.
이 음반에서 클라리넷 독주를 맡은 프랑수아 울이 작곡한 ‘협주곡’도 다채로운 음향의 앙상블이 돋보이지만, 음색의 배합이나 화음의 형태로 보아 플라몬든과 같이 모자이크와 같은 음향의 캔버스라기보다는 감성적인 정서를 전달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구조도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고전적인 형식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프랑수아 울은 신고전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서정적인 느린 부분은 불충분한 화음에 감상자의 무의식적인 참여를 유도하며, 빠른 부분에서는 바흐의 프렐류드와 나이먼의 색소폰을 떠올리게 하는 선율이 이 시대의 연주자들이 갖는 다중양식적인 음악적 환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울은 아직 과거의 울타리에 매여 있다.
마지막 곡은 지아친토 셸시의 ‘키야’로서, 이 음반에 등장한 작곡가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셸시는 독주자를 위한 작품에서는 앙상블 작품에 비해 보다 다이나믹한 연출을 보여주는데, 이 작품에서 독주 클라리넷은 화려한 고독을 노래한다. 앙상블은 클라리넷에 멍석을 깔아주지만 앞의 작곡가와는 그 재질이 확실히 다르다. 앞에서는 오브제까지 달려있는 화려한 카펫이라면, 셸시는 은은히 윤이 나는 단색의 비단이다. 하지만 빛의 방향에 따라 그 안에 무지개 빛이 숨어있는데, 이 빛을 본 사람은 셸시의 진면목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약간 물러서 있으면서도 공간적으로 녹음된 터닝 포인트 앙상블의 음향은 이러한 이면 세계를 빛을 은은하게 비춰준다. 클라리넷에게 정신이 팔려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클라리넷의 잘못이 아니다.
- 월간 La Musica - 송주호
[ 수록곡 ]
1. Liquid (John Korsrud)
2. Schrift (Yannick Plamondon)
3. Concerto (Francois Houle)
4. Kya I - Iii (4-6) (Giacinto Scelsi)
